공간사옥의 숨겨진 비밀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공간사옥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글을 읽은 후 그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김수근이 남긴 이 건축에는 50여 년간 아무도 모르고 지나쳤던 비밀이 숨어 있다. 2014년 아라리오뮤지엄으로 재탄생하면서 드러난 이 미스터리들을 하나씩 풀어보자.

사옥에서 미술관으로

1977년 율곡로. 공간건축의 사옥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단순한 사무공간을 넘어서 한국 문화계의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2013년 경영난으로 문닫을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이 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최소한의 변형만 가하겠다”고 선언하고 10개월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40년간 쌓인 잡동사니 뒤에서, 벽 너머에서,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식 속에서 말이다.

  • 과거 공간사옥 구본관에 있던 김수근 건축가의 작업실(필자 제공)

  • 과거 공간사옥의 구본관에 있는 접견실 전경(필자 제공)

네 번째 건물의 정체

누구나 공간사옥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고 있다. 김수근이 설계한 본관(1977년), 2대 소장인 장세양이 설계한 신관(1997년), 그리고 3대 소장 이상림이 리모델링한 한옥(2002년). 하지만 이것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김수근이 설계한 본관은 사실 두 개의 별도 건물이다. 1971년 먼저 지어진 남쪽의 구본관과 1977년 증축된 북쪽의 신본관. 두 건물은 브리지와 로비, 나무 데크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건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정반대의 논리로 디자인된 건물이다. 원래 김수근이 살던 주택에 지어진 구관은 대지면적 113.㎡(34.3평)의 협소한 비정형 땅이다. 그만큼 이를 십분 활용해 최대한의 면적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짜임새와 효율을 높이고자 낮은 층고 반층씩 오르는 ‘스킵플로어(skip floor, 중층)’와 낮은 층고의 작은 방을 구석구석 넣었다.

아라리오 뮤지엄 전경

  • 구본관의 출입구. 노란색 문은 공간소극장으로 이어졌으나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 아라리오 뮤지엄의 입구

사옥을 짓는 사이 당초 15명 내외였던 직원이 두배로 늘었고 정동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기도 했다. 결국 사옥을 확장해야 했고, 구관을 완성한지 4년이 지나 증축 공사를 시작했다. 주변의 세 필지를 추가로 마련해 북측의 큰 필지를 가득 채워 신관을 계획했고, 남측을 바라보는 나머지 공간에 정원을 조성했다. 증축부 면적은 기존보다 두 배가 넘는다. 면적이 여유가 생기자 김수근은 구관에서 제한됐던 공간 표현과 실험에 더 적극적이었다. 신관의 다양한 공간감은 그렇게 탄생했다.

잃어버린 쓰임을 되찾다

미술관 투어는 구관앞에서 몇개의 계단을 내려온 뒤 뮤지엄샵에서 시작한다. 김수근이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판매하던 낮은 천장의 ‘크래프트 코너(Craft Corner)’는 미망인이 직접 운영하던 카페로 쓰였다. 이후 공간서가라는 라이브러리로, 매각 직전에는 공간지를 만들던 공간사의 사무실로 쓰이다 원래대로 샵으로 바뀌었다.

바로 위층인 2층(북측 대지가 높아 외부에서 보면 2층이 1층이다)은 처음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다가 사무실과 서버실로 바뀌었는데,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곳엔 황색 람보르기니(‘The Sculpture II’)가 들어섰다. 권오상은 사진 같은 조각, 조각 같은 사진으로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며 물질의 고유한 성질을 가리고 관람객을 혼돈에 빠트린다. 무게가 1.5톤이 넘지만, 물감 때문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권오상, 《The Sculpture II》, 2005, 청동에 채색

반 층 더 올라가면 과거 사옥 로비가 있던 곳에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설치했다. ‘노매드’, ‘히드라 부다’, ‘TV 첼로’등 4개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현대 미술작가의 작업을 사옥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설치했다. 이곳은 본관의 신관과 구관, 유리 건물인 신사옥과 연결되는 인터체인지와 같은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삼각형과 원형, 두 계단의 비밀 대화

뮤지엄으로 바꾸면서 안전을 위해 철제를 덧댄 삼각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화장실과 작은 창고까지 모두 전시공간으로 바꿨다. 화장실에 설치된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의 ‘Making of Monster’ 작품에선 때마침 세면 거울을 보는 장면이 나왔다. 원래 사옥도 작은 틈이나 벽면에 예술 작품들을 전시했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한 것이다.

코헤이 나와, 《PixCell- Double Deer #7》,

구본관과 신본관은 이렇게 좁은 대지를 적극 활용하면서 수직적으로 확장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구본관의 원형 계단과 신본관의 삼각형 계단의 비교도 흥미롭다. 구본관의 원형 계단과 신본관의 삼각형 계단. 단순히 디자인적 선택이었을까? 원형은 완벽함과 영원함을 상징한다.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순환. 반면 삼각형은 역동성과 상승을 의미한다.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형태.

김수근은 이 두 계단을 통해 건축가의 철학을 숨겨두었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미래, 안정과 변화. 이 모든 대립적 요소들이 구관과 신관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더 흥미로운 점은 관람객들이 이 계단들을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건물의 모든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 구본관의 원형 계단

  • 신본관의 삼각형 계단

2014년 리모델링 과정에서 발견 중 하나는 옥탑 공간이다. 율곡로에서 '空間'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공간은 오랫동안 창고와 관리인 휴게실로만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40년 넘게 쌓여있던 잡동사니들을 치워내자 작은 방 2개와 제법 큰 공간 1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고고학적 발굴처럼, 시간의 지층을 벗겨내니 새로운 세계가 나타났다. 청소원 대기실은 개빈 터크(Gavin Turk)의 ‘Another Bum’이 총을 겨누고 있다. 순간 바로 옆에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들려 더 무서운 분위기로 바뀌는데, 모니카 본비치니(Monica Bonvicini) ‘Blind Shot’이다. 날카로운 드릴이 공중에서 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이런 음산한 분위기를 중화하기 위해 사용한 그 옆의 미인도는 탁월한 선택이다.

아라리오 뮤지엄의 ‘空間 SPACE’ 간판

미래에서 온 투명한 상자

1997년 장세양이 설계한 신관은 기존 벽돌건물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공간사옥과 반대로 읽힌다. 왜 이런 극단적인 대비를 만들었을까?

비밀은 ‘대화’에 있다. 김수근의 벽돌 건물이 전통 건축의 ‘땅’을 상징한다면, 장세양의 유리 건물은 미래와 ‘하늘’을 상징한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불투명한 것과 투명한 것, 과거와 미래가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통로와 브리지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투명한 유리 커튼월 내부로
원기둥(엘리베이터)가 보이는 신관 전경

상층의 필로티이자 지하로부터 최상층까지 관통하는 커다란 원기둥은 내부에 나선형 계단을 담아 김수근 집무실의 원형 공간 및 원형 계단실을 동시에 암시한다. 또한 각 층마다 입구로 진입하는 계단길의 방향에 변화를 줌으로써 구사옥에서 느꼈던 다양한 수직 동선의 기억을 호출한다. 1층과 4층의 계단길에 비스듬한 각도를 둔 것은 구사옥의 삼각형 계단을 더 강하게 연상시키는 요소다.

지금 신관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활용된다. 사무실로 쓰던 시절 따가운 햇빛을 가리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블라인드를 내려서 사용했다. 상업공간으로 바뀐 지금, 애초의 설계 의도대로 투명성이 더 빛나면서 주변의 창덕궁을 반사하기도 또한 내부로 담아내기도 한다. 특히 4층에는 더 그린테이블이 위치한다. 경복궁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4층 더 그린테이블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전경(더 그린테이블 제공)

마지막 퍼즐, 한옥의 등장

사옥 미스터리의 마지막 조각은 한옥이다. 36.2㎡(11.0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그 의미는 작지 않다. 이 한옥은 시간의 역설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건축양식이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다.

김수근의 모더니즘, 장세양의 미니멀리즘, 그리고 이상림의 전통 재해석. 세 세대의 건축가가 각각 다른 시대정신을 가지고 한 곳에 모인 것이다. 이 한옥에서 온돌의 따뜻함을 느끼며, 방문객들은 깨닫게 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간사옥이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4층 더 그린 테이블

이상림이 재해석한 한옥과 앞마당.
지금은 카페로 쓰인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공간사옥은 그 완벽한 증명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지붕 아래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살아있는 건축물. 다음에 공간사옥을 방문할 때는 단순히 전시작품만 보지 말고, 건물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40년간 쌓인 수많은 비밀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Info] 히든 에스파스:
한국 현대건축 대표 명작 <공간사옥>을 거닐다

일시: 9월 23일, 11:00~15:00 (약 4시간 소요)
장소: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매표소 앞
인원: 15명 내외

Credit

Editor

심영규 건축PD

Photo

Arario Museum in Space 제공(별도 표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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